‘장애인 학생을 위한 인권운동, 끝까지 간다’, 김형수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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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교사는 학생을 고르지 않는다’

“장애로 인해 불편하지 않나요?, 어떻게 긍정적으로 바뀌셨나요?”

때때로 그에게 ‘장애’에 대한 생각이 언제 바뀌었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는 ‘장애’에 대한 생각을 바꾼 적이 없다. 장애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운 스승들 덕분이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었던 김인선 선생님은 “학교와 교사는 학생을 고르지 않는다”며 뇌성마비 장애인인 그를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도왔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그가 빚은 상반신이 없는 조각상을 보며 “특별하고 유일하다”고 칭찬해준 미술 선생님 덕분에 장애를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개성이자 자부심으로 품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장애가 있음에도 큰 역경 없이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더욱 굳건히 홀로서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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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도 못 버티고 자퇴한 후배열악한 장애인 학생 권리에 눈을 뜨다’

장애인 학생으로 대학 생활을 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동, 학습, 식사 등 장애인을 위해 고려되어있는 시설 및 인프라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혼자 밥을 먹는 것조차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 독립적인 존재를 부정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돌계단에 목발을 곁에 두고 앉아 눈물 젖은 700원짜리 김밥을 먹는 것이 가장 자유롭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는 그저 ‘나 혼자 감수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이 생각은 대학교 2학년 때 송두리째 바뀌었다. 시각장애 신입생이 심리학과에 입학했다가 얼마 후 공부하기 힘들다며 자퇴를 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 계기였다. 신문을 통해 소식을 알게 된 그는 후배가 자퇴했다는 사실에 강한 죄의식을 느꼈다. 선배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현실이 그를 옥죄어왔다.

“이놈의 학교! 학교를 엎어보자”

다시는 후배들이 학교를 그만두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그는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국내 최초 장애인 인권 동아리 ‘게르니카’를 설립하고, 다른 학교 학생들과도 연대하며 열띤 활동을 펼쳐나갔다. 한때는 학교에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경사로 설치와 같은 장애인 편의시설을 만드는 것을 반대하여 중앙도서관에 휠체어를 매달아 퍼포먼스를 펼친 적도 있다. 이로 인해 부정적인 질타를 받았지만,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부딪히는 것은 비장애인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기에 활동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항상 지니고 있었던 내적갈등과 딜레마가 그의 발목을 붙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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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교육법 제정을 이루던 그 날, 또다시 투쟁의 길로 돌아섰다’

그는 매해 900회 이상 장애인 인권교육 진행, 장애인 학생 대학 진학 및 취업 상담 수행 등 끊임없이 장애인 인권증진 활동을 펼쳐왔다. 활동을 지속하면서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항상 내적 딜레마를 품고 있었다. “장애인의 인권 활동이 장애인의 이익만을 위한 활동이 되면 어떡하지?”, “다양한 유형 장애인들의 필요와 요구가 과연 인권적으로 수렴할 수 있으며,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었다.

그는 ‘비장애인과 함께 어울리는 사회’를 만들고자 다짐했던 초심을 돌이키며 결국 모두는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사회구성원 모두가 각성하는 것이 중요함을 느낀 순간부터 사회문제의 해결을 통해 장애인 문제를 해결, 장애인 문제 해결을 통해 전체 인권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큰 꿈을 가지게 되었다.

장애인 학생을 위해 달려왔던 오랜 시간과 열띤 투쟁, 그는 2007년 특수교육법이 국회에 통과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새로운 변화가 펼쳐질 의미 있는 순간이었지만, 그는 다시 투쟁 현장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품은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 모두를 이어 전체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것, 수많은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그는 끝까지 가보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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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원의 상금, 나와 모두를 잇는 투쟁’

그는 한국장애인인권상 상금을 받고 오랜 시간 고민을 했다. “인권상 수상을 개인의 영광이 아닌 인권 운동을 지속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 어떻게 사용할까?”라는 고민이었다. 고민 끝에 한국장애인인권상의 이름으로 가장 필요한 곳에 기부하는 ‘기부 투쟁*’을 통해서 인권 활동에 연대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총 5곳 이상의 기관 및 단체에 재정지원, 물품 기부 등을 하고, 기부처를 널리 알려서 지원 액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온라인 기부 투쟁을 펼쳤다.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 이 생각은 오래가지 못하기에 그는 인권적인 사람이 되려면 훈련과 연습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부투쟁 역시 다수가 인권적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끄는 새로운 발판인 셈이다. “앞으로 인권 활동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겨 후속 세대들에게 잘 남겨주는 것이 남은 과제”라고 말하는 김형수 사무총장, 그는 여전히 인권증진 활동을 모두와 함께할 방법을 찾고 참여를 독려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22회 장애인 인권상 수상, 상금에 0 하나를 더 붙여 볼까요? 기부 투쟁에 연대해 주세요.

https://url.kr/z7345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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