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권리보장법을 아시나요
장애인권리보장법. 들어는 봤지만 내용은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다. 일단 법이라는게 딱딱하고 내용이 많기 때문에 봐도봐도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처음 시작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 7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중심으로 장애계는 ‘장애등급제 폐지 공대위’를 구성하여 장애등급제의 부당함을 알리기 시작했다. 2012년 ‘2012대선장애인연대’ 등은 대선 후보자에게 장애등급제 폐지 및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을 공약으로 반영할 것을 촉구했다.
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뿐 아니라 유력 대선후보가 앞다퉈 장애등급제 폐지와 권리보장법 제정을 약속했던 세월이 10년도 넘게 흘렀다. 지금 돌이켜보면 장애등급제 폐지와 권리보장법은 함께 세트로 다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정부는 2013년 장애판정체계기획단을 꾸리고, 2019년 7월 장애등급제 폐지만 먼저 시작했다.
정부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면서 수요자 중심의 장애인 지원체계로 전환된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현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오랜 시절 동고동록한 장애등급이 하루아침에 ‘심한 장애’와 ‘심하지 않은 장애’로 단순화됐지만 이렇다 할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1년 만의 변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장애등급제 폐지가 우리의 요구와는 다르게 시행될 위기에 처했다”
– 장애등급제 폐지 시행 첫 날 박명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
장애계가 장애등급제 폐지를 주장한 것은 장애인 저마다 각기 다른 신체조건과 상황을 가지고 있기에 특정 장애등급으로 획일적으로 서비스가 결정나는 판정체계가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등급제 폐지만 먼저 시행되는 바람에 개인의 욕구와 상황에 맞는 서비스 연결은 아직 요원하다.
반쪽짜리 정책이 된 장애등급제 폐지, 장애등급이라는 진입장벽을 낮추는데 그치지 않고 장애당사자가 원하고 필요한 서비스까지 연결돼야 진정한 수요자 중심 지원체계가 된다!
정책의 소비자로 거듭나게 할 장애인권리보장법
수요자 중심 지원체계의 기본은 서비스 이용자를 ‘수혜자’ 혹은 ‘대상자’가 아니라 ‘소비자’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장애인정책의 이용자는 정책의 소비자로 각종 복지 혜택을 주는대로 받고, 받는 것에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마땅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참고로 소비자기본법에서는 안전, 정보제공, 선택, 의사반영, 보상, 교육, 단체조직, 쾌적한 환경 등의 8가지 권리를 소비자에게 보장하고 있다.
장애인권리보장법이 제정되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하나, 장애인이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 서비스 이용자로서의 권리가 법에 명시된다.
<장애인복지서비스 이용자의 5가지 권리>
1) 지역사회 참여와 자립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신청하고 이용할 수 있는 권리
2) 서비스를 신청·이용하는 과정에서 장애유형, 정도, 소득수준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아니하고 신청·이용할 권리
3) 서비스를 신청·이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의사소통방식으로 정보를 제공받고 관련 정보를 요청할 권리
4) 지역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동등한 삶을 누리는데 필요한 서비스를 필요한 만큼 신청할 권리(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정당한 사유 없이 복지서비스의 종류와 양을 제한할 수 없음)
5) 복지서비스를 신청·이용하는 것과 관련된 정책 및 제도에 대한 의견 표명 권리(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반영할 수단 마련 의무)
둘, 장애인의 권리가 침해당했을 때 권리구제 절차가 마련된다.
지금도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이 운영되고 있지만 장애인학대 사건에 대한 예방과 개입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단순 학대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더욱 광범위한 차원에서 보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시외로 이동하는 버스 등 교통수단이 없어 이동권에 차별을 당했다고 느꼈을 때 지금은 서울과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장애인당사자가 각기 소송을 제기하여 부당함을 알리고 있다.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일은 개인의 시간과 재정이 투입되기에 모든 장애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논리적으로 증거를 수집해야 하고 변호사를 수임하여 조력을 얻을 능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동일 사안에 재판부마다 판결이 다르게 결정될 수 있다. 법원 판결에 따라 이쪽 장애인은 혜택을 받고, 저쪽 장애인은 적용되지 않는게 타당한 일인가? 더구나 차별 피해를 받았다고 인정되더라도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에게만 피해보상이 이루어지는게 우리나라 장애인의 권리구제 현실이다.
장애인권리보장법이 제정되면 ‘단체소송’이라는 권리구제절차가 도입되어 유사사건에 힘을 모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장애인권익옹호기관도 장애인의 권리침해에 대해 더욱 넓은 범위에서 모니터링하고 조사하는 권한이 강화될 수 있다.
셋, 장애인지예산, 장애영향평가, 장애인정책책임관 등의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어 정책 수립단계에서부터 예기치 않게 발생할 수 있는 장애인의 차별과 불평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장애인지예산: 장애인 관점에서 평등과 사회통합을 실현하기 위한 예산
*장애영향평가: 법과 정책이 장애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여 이롭게 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제도
*장애인정책책임관: 해당 기관의 효율적 장애인정책 수립·시행을 위한 담당자
넷,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의 기능이 강화된다.
장애인정책의 주무부처는 보건복지부이지만 장애인 문제는 복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장애인정책종합계획 등 국가의 중요한 장애인정책을 결정하는 위원회가 국무총리 산하에서 각 부처 장관이 모여 연례행사로 운영되어 왔다. 그러나 장애인권리보장법이 생기면 대통령 산하로 격상되거나 사무처가 생겨 정부부처마다 흩어져 있는 장애인정책을 조정하고 책임성이 강화된다.
다섯, 서비스 제공절차가 권리 중심으로 변화된다.
지금은 장애인등록을 하고 당사자가 서비스별로 신청하면 장애정도나 장애유형, 소득 등 상황에 따라 서비스 제공 여부가 결정된다. 당사자의 역할은 서비스 신청까지이고 공급자의 결정을 따르는 식이다.
하지만 장애인권리보장법은 서비스별로 욕구조사를 실시하여 결과에 따라 개인별 지원계획을 수립하여 필요한 서비스가 결정된다. 장애당사자는 조사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서비스 결정까지의 기한이 명시되어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핵심 공약인 개인예산제까지 도입되면 장애인의 선택권과 권리가 더욱 보장되는 변화가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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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리나라는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선택의정서를 비준하면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이행해야 할 책무가 더욱 강하게 생겼다.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으로, 의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서비스를 제공하던 장애인복지법은 4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곳곳을 땜질 개정하며 버텨왔지만 이제는 한계치에 다달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지금 시대에 맞는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이 전면 필요한 이유다.
작성자 :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남궁 은 책임